인터뷰

김정숙 여사의 버선코 신발 만든 구두 명장

글. 위성은 사진. 황종범



수제화는 기성화가 아닌, 수가공의 맞춤신발을 말한다. 각자의 발이 갖고 있는 고유성에 맞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편한 것은 물론이고 유니크한 디자인을 신을 수 있다. 김정숙 여사의 신발로 화제가 된 버선코슈즈를 만든 전태수 JS슈즈디자인연구소 대표는 48년간 신발 외길만 걸어온 장인이다. 발에 착 들어맞는 그의 수제화에는 고집스러움과 배려가 깃들어있다.

48년 외길인생, 결실을 보다

수제화는 한 켤레 한 켤레가 각각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개개인의 발 모양에 맞게 입체를 디자인해서 제작한 구두를 신는 일은 호사에 가깝지만 수제화 시장이 성장하면서 점차 단가도 낮아지는 추세다.
수제화의 역사는 근대화와 궤를 같이한다. 서울역 앞 염천교 거리는 100년에 달하는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거리로 1970~80년대에는 명동의 양화점이 최신 유행을 선도하며 멋쟁이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012년 서울시가 수제화산업특화지역으로 지정한 이래 성수동시대가 활짝 열렸다. 소상공인들이 입주한 수제화타운이 들어서고, 장인들의 공동브랜드가 기성화와 수제화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 있다. 전태수 장인은 명동시절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성수동에서도 손꼽는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 48년이란 세월이 그의 손끝에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대장장이셨습니다. 그리 부유하지는 못해서 신발 기술을 배우려고 초등학교만 마치고 상경했습니다. 궂은 일 하는 시다부터 시작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명동 시절엔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서 월급도 꽤 많이 받았습니다. 제 가게도 차리고 잘 나가다가 직격탄을 맞은 게 IMF였고요. 파산을 하고 단칸방에서 살다가 작업공간만 겨우 마련해서 다시 시작한 사업이 입소문을 타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습니다. 단지 오래 버텨서는 아니고 늘 저만의 패턴을 연구하는 자세로 해왔습니다.”


전 명장의 신발은 온라인 마케팅이나 언론홍보가 없던 시절, ‘입소문’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의 구두는 연예인들도 많이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체중을 지탱하는 발은 기실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몸무게의 힘을 받쳐줘야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오래 신어도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겉보기에만 예쁜 신발을 만들면 발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직접 와서 정확한 발 모양과 크기를 측정 후 제작에 들어가는데 발 치수와 함께 발 사진을 찍어 보내는 등 더 편하게 맞추는 것도 가능하다. 비치되어있는 샘플 디자인 중에 선택하거나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직접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부인의 신발로 매스컴에 오르내린 후 주문이 몰려 휴일에도 직원들은 쉬게 하고 혼자 나와 근무한단다. 작업복에 베레모를 쓰고, 재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장인의 풍모가 여실한 것은 그의 소탈한 품성 때문이 아닐까.


도시재생 통해 수제화타운으로 재탄생

성수동은 최근 도시재생의 중심지로도 떠올랐다. 도시재생 흐름과 맞물려 버려진 창고나 상가 등에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정미소 혹은 창고로 쓰이던 건물이 힙한 카페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성수동 인근에는 옛 외양을 그대로 간직한 상가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임차료가 저렴한 데다 가죽·원단·부품 공장 등 수제화 생산에 필요한 인프라도 구축돼 있는데다 장인의 손길, 최신 감각까지 더해져 발길 뜸하던 거리가 활기를 띄게 된 것이다.
지난해 최초로 열린 대한민국 수제화 명장 선발대회에서 전 대표는 1호 명장으로 인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년 이상 수제화 분야에서 종사하고 제작한 사람들이 출전할 수 있는 대회였다. 전 명장의 연구소는 ‘서울 학생 직업체험 교육기부 인증기관’으로 선정돼 중·고등학생들이 수제화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는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제2의 도전으로 창업을 꿈꾸는 직장인들도 여럿 가르쳐서 내보냈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지만 이제 현직에서 일할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수제화의 명맥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기피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의 적성을 찾을 기회가 너무 늦게 주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특성화학교가 더 늘어서 일찍이 구두 디자이너의 진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청소년들의 자상한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수제화는 물론 비싸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매 과정 사람의 손길과 노력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 편안함은 기성화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 한 번 수제화를 신어본 사람은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도 그래서다. 힐을 신어도 굽 없는 신발만큼의 편안함을 주려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을 거쳐야 했을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발로 국제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많은 세월 덕분이다.
“보좌관들이 와서 사진도 찍고 자세히 물어보고 갔습니다. 나중에 전화가 와서 영부인 신발을 주문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청와대에 들어가서 사이즈 측정을 하고 시제품을 만들어가니 좀 더 편안한 신발을 주문하시더라고요. 한국적 곡선을 살린 디자인에 신경 썼습니다. 완성된 신발을 찾으러 직접 오셨는데 이웃 아주머니처럼 소탈하시더라고요. 결제도 보좌관들이 카드로 하려 하니 현금으로 드리라고 하시더군요(웃음).”
오늘도 고객을 직접 응대하며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일일이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장인의 모습에서 수제화에 대한 긍지를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