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이슈]
‘철의 도시’에서 ‘문화 도시’로
텅 빈 창고에 활짝 핀 예술, 대만 가오슝
글·사진 : 채지형 여행 작가
대만 남부에 자리한 가오슝은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도시다. 한때 물동량 세계 3위를 차지했던 가오슝 항구는 중공업의 쇠락과 함께 잊혀졌다. 가오슝 항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은 주인공은 문화와 예술이었다. ‘보얼예술특구’라는 이름 아래 항구 곳곳은 예술의 옷을 입고 문화가 채워졌다. 항구는 마법처럼 부활했고, ‘철의 도시’ 가오슝은 ‘문화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중공업 쇠락과 함께 침체된 가오슝 부두
대만 가오슝 제1 관광지 보얼예술특구(駁二藝術特區)에 가면, 허리에 연장을 찬 거대한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물을 들고 있는 어부 조형물과 함께 가오슝의 도시재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이 조형물은 공업도시였던 가오슝을 의미한다.
보얼예술특구가 있는 가오슝은 대만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항구도시다. 가오슝 항의 역사는 18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텐진 조약에 따라 개항한 이후, 일제 강점기 때 대만 농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주요 창구 역할을 했다. 대만의 발전과 가오슝 항은 궤를 같이 했다. 가오슝 항은 수심이 깊은 바다를 끼고 있어 원자재를 수입하고 완제품을 수출하기 안성맞춤이었다. 1999년에는 컨테이너 처리량 기준 세계 3위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가오슝 항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중공업 중심 산업이 쇠락하면서 공장은 문을 닫고 창고는 하나둘 비었다.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달리던 열차는 멈췄고 찾는 이도 뜸해졌다.
녹슨 컨테이너에 담은 예술가의 상상력
가오슝 항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만 국경절을 맞이해 불꽃놀이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가오슝 항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부두에서 대형 이벤트가 펼쳐졌고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예술가들은 하나둘 가오슝 항구에 모여 텅 빈 컨테이너에서 전시를 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가오슝 항을 찾는 이들도 서서히 늘었다.
가오슝 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창고를 직접 임대해, 문화예술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등 발 빠르게 지원했다. 2006년부터는 문화국 아래 운영센터를 별도로 조직, 체계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예술가들의 활동과 정부의 노력으로 보얼예술특구는 가오슝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한 해 찾는 관광객만 해도 400만여 명에 달한다. 가오슝 디자인 페스티벌을 비롯해 국제컨테이너예술제, 철강조각예술제, 라이브 창고음악 콘서트 등 축제와 이벤트도 끊이지 않는다. 딱딱한 공업도시에서 알록달록한 예술도시로, 매력 넘치는 보얼예술특구는 도시의 이미지까지 바꿔 놓았다.
다용, 펑라이, 다이 창고 클러스터
보얼예술특구가 자리한 곳은 가오슝항 제2부두 3도크로, 보얼(駁二)이라는 이름도 배를 대던(駁) 제2(二) 부두라는 뜻이다. 보얼예술특구는 다용 창고 클러스터와 펑라이 창고 클러스터, 다이 창고 클러스터 이 3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먼저 조성된 다용 창고스 클러스터는 현대 미술에 관심 있다면 빠트리면 안 되는 공간이다. 전체 12개의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2차 세계대전 때 지어진 건물로, 공연장, 전시장, 영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2년 문을 연 펑라이 창고 클러스터는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가오슝 최초의 기차역이 있었던 곳으로, 철도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펑라이 창고 클러스터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은 미니 기차다. 바다를 건너온 물건을 내륙 곳곳으로 운송하던 열차가 앙증맞은 미니 기차로 재탄생됐다.
세 구역 중 가장 나중에 생긴 다이 창고 클러스터에서는 작가들의 섬세하고 독창적인 디자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6개 창고 중 C9 창고는 예술가들의 레지던시로 사용되고 있다. 다이지구는 과거 사탕공장이었던 지역으로, 창고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은 역사관도 있다.
KW2의 가장 큰 매력은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리모델링했지만, 역사적인 요소는 고스란히 보존했다. 창문의 소박한 느낌과 낡은 담벼락은 옛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 예술과 상업, 공무원과 전문가의 조화
보얼예술특구의 놀라운 성장 뒤에는 가오슝 시 정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숨어있다. 보얼예술특구는 시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문화특구로, 가오슝 시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가오슝 시는 문화국 산하에 보얼예술특구센터를 따로 두고 공무원과 민간 기획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게 했다. 공무원의 행정력과 전문가의 상상력이 합해져 시너지를 만들었다.
보얼예술특구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예술 공간과 상업 공간의 조화에 있다. 특구 안 전시장과 공연장은 보얼특구센터에서 관리하고, 상업시설은 민간에게 맡겨 운영한다. 민간에서 운영하지만, 보얼예술특구와 어울리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깐깐하게 관리한다. 또 특구와 어울릴 만한 곳을 직접 찾아 나서, 입점을 유도하기도 한다.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머리에서 손끝까지 이어진다.
보얼예술특구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오슝 항의 역사와 현대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점이다. 갈라지고 녹슨 창고는 그 자체로 역사를 보여준다. 그 안에 창의적이고 젊은 감각의 문화와 예술을 녹여냈다. 보얼예술특구는 조화와 균형이 도시재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