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걷다]
봄내음 물씬 느낄 수 있는 걷기 좋은 골목
사직단 뒷길 & 대학로
글·사진 여행작가 이동미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 몇 군데나 되겠는가? / 그것도 한잔의 커피와 /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학림(學林)다방 입구에 세워 놓은 시인 황동일의 헌시(獻詩)에서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행객들이 오가는 이곳은 경복궁이다. 북적이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번다함을 살짝 벗어나 발길을 돌려본다. 경복궁역 1번 출구 쪽을 향하면 사직로가 이어진다. 이 길을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하는 사직단은 태조 이성계가 많은 공을 들인 공간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후 태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경복궁을 비롯한 5대 궁과 함께 유교 법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했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종묘가 조상에게 정신적인 안위를 기원하는 공간이라면, 사직단은 먹고사는 문제를 보살펴달라는 물질적인 기원의 공간이다.
백성에게 제대로 된 일기(日氣)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니, 가물대로 가문 날씨에 곡식이 말라비틀어지면 왕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더 이상의 제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 나라를 보살펴 달라는 기원의 통로가 차단된 것이다.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전락했고 사직로를 만들면서 사직단의 정문은 14m나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다소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다. 덩그러니 남아 있는 사직단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인왕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로 들어선다.
고종황제의 활터, 황학정
사직단을 한바퀴 돌고, 인왕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로 들어서면 단아한 정자 한 채가 보인다. 황학정이다. 황학정 마루에 앉으니 살랑살랑 인왕산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사대(射臺)에서 궁대(弓帶)를 허리에 매고 각지(角指)를 낀 대여섯의 궁수들이 순서대로 시위를 당긴다. 팔뚝에 힘줄이 불끈하면 시위를 떠난 화살은 145m 떨어진 과녁에 꽂힌다. 그들의 활 쏘는 뒷모습에 겹치는 인물이 있으니, 고종황제다. 광무 3년(1899) 고종황제는 활쏘기를 장려하고자 7,000여량의 내탕금을 들여 활 쏘는 정자를 마련했다. 청국, 일본, 러시아 등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외세에게 상무정신을 보여주고자 고종황제는 황학정에서 친히 활을 쐈다. 하지만 1992년 일제는 경성중학교를 짓는다며 경희궁을 헐었고 경희궁 내의 건물은 일반에게 매각해 버렸다. 한 나라의 황제가 활 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때 경희궁의 황학정을 매입해 인왕산 자락의 옛 등과정 터로 옮긴 것이 지금의 황학정이다. 이후 일제는 무술을 전면 금지했고 그 많던 활터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쨍쨍한 하늘을 원망하며 하늘에 제를 지내던 조선의 어느 왕과 활을 쏘며 울분을 풀던 고종황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21세기의 온갖 문명이 난무하는 사직로에서 500m 남짓한 거리인데 이곳 황학정엔 시간이 흐르지 않는가 보다. 호랑이가 무서워 오르지 못한다던 인왕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문리대 제25강의실, 학림다방
어스름 저녁이 내려 사람이 그리워지면 대학로로 걸음을 옮겨본다. 하루에도 수만의 인구가 지나다니는 대학로의 명물은 역시 마로니에 공원이다. 정작 마로니에 나무는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보다 몇 배는 많은 젊은이로 북적였을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 자리다. 서울대학교가 개교했을 당시에는 각 단과대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중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미술대학 그리고 대학본부가 이곳 동숭동에 있었다. 학교통합론이 제기되었고, 결국 관악산 기슭으로 모두 옮겨 지금의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이사하고 남겨진 건물 중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건물은 아파트 단지가 될 뻔했는데,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지금의 공원이 되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1960년대 서울대 학생들이 오가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을 논하고, 독일 슈바빙을 이야기하고, 장발에 이젤을 옆에 끼고 이곳 교정을 오갔을 것이다. 서울대 화학부 신국조 교수의 동숭동 캠퍼스 회상을 보면 “1963년의 동숭동 문리대, 미라보 다리로 세느강을 건너 캠퍼스에 들어오면 마로니에 나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라는 글이 있다. 혜화동과 이화동을 잇는 동숭로는 예전에 문리과대학 쪽으로 ‘세느강’이라 불리던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학교에 들어가려면 정문 앞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러고 보니 마로니에 공원과 도로와의 경계에 실개천과 작은 다리의 흔적이 있다. 세느강과 미라보 다리를 상징적으로 남겨놓은 듯하다.
향학열과 젊음의 용광로, 대학로
오월이 되면 서울대 문리과대학은 ‘학림제’라는 축제를 개최, 시화전을 하고 막걸리 마시기 대회를 했다. 문리대 캠퍼스 정문을 나서 혜화역 쪽으로 걸어가면 맞은편에 ‘학림다방’이 있다. 학생들에게 ‘제25강의실’로도 불리던 학림다방은 ‘학림제’에서 그 이름을 빌렸다. 삐그덕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1천5백여 장의 클래식 LP판이 줄지어 있고, 탄노이 스피커에선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많은 학생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아 지그시 눈을 감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다가 시를 쓰고, 니체를 논하고, 배가 고프도록 토론을 했었다. 천상병·이청준·황지우·김승옥·전혜린·김지하·황석영·홍세화·김민기 등 걸쭉한 인물들이 모두 학림다방을 거쳐 갔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장소다.
학림다방 뒤쪽으로 사거리를 지나면 성균관대학교다.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조선 시대 서울대학교에 해당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충선왕 때 당시 최고 교육기관이던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학이 있던 곳이라 대학로라 이름 붙은 이곳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수많은 젊은이가 향학열에 불탔던 곳이고, 번쩍이는 아이디어와 용기가 끓어오르는 젊음의 용광로다.
사직단과 황학정이 조선의 패망을 배경으로 한 왕실의 흔적이라면, 대학로는 현재진행형인 젊음과 미래의 공간이다. 또다시 베토벤 ‘쯤’을 곁들이는 학림다방의 비엔나커피가 생각난다. 2층에 앉아 카페와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서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걸으며 ‘우리’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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