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옴부즈만칼럼] 


정말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수 없을까?  


글 주영남(서울주택도시공사 청렴옴부즈만)

 




우리는 일상사회에서 다양한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면서 생활합니다. 회사에서는 업무와 관련해서, 지인들과는 그 나름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어느 때는 편한 주제로, 어느 때는 불편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편한 주제여도 대화의 과정과 결말이 반드시 편함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며, 불편한 주제의 대화라고 해도 모두에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대화의 주제가 불편한 것이더라도 개인과 집단의 존엄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 대화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주제 가운데 부패와 청렴에 대해 논할 때 제3자적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부패와 청렴은 우리에게 불편한 대화의 주제일 겁니다. 부정부패는 일반적으로 사회고위층과 직장 내 고위직에서만 발생되는 사건이고 나와는, 우리와는 무관한 것처럼 규정지어 대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부패를 저지르고 사회의 공정성을 깬 집단과 개인들에 대한 대중의 비판은 냉철할 정도입니다. 문제의 대안을 제시 하는데 있어서도 구체적입니다. 당연한 과정입니다. 더 그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공간에서 더 깊게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와 청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외부의 부정부패와 청렴에 대해서는 열성적으로 대안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공정한 비판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부정부패와 청렴에 대한 입장을 말할 땐 은연중 이런 표현을 씁니다.

 

“물이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 수 있겠어?”

“1급수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얼마나 되겠냐?”

“많은 물고기가 1급수 이하에서 살고 있지 않냐?”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었던 이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청렴? 좋은 말이긴 한데 그게 잘 되겠어?”

“그냥 포기 하고 살아!”


이런 뉘앙스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인간은 1급수에 살 수 없는 물고기인가?’ 혹은 ‘내 직장은, 우리 사회는, 평생 1급수가 될 수 없는 곳인가?’라는 회의가 생겨납니다. 존엄감과 미래가 상실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대작 <문명화 과정>을 보면 옮긴이의 글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시대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 인간들이 알고 할 수 있는 것,

그들이 높이 평가하고 모범으로 받아들이는 행동,

또는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하여 거부하는 행동과 감정의 기준은

어느 날 갑자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진 것이며,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2~3급수보다 1급수가 많은 청정사회가 된다거나, 그 1급수 물에서 물고기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 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행동’을 거부하고 누구나 ‘높이 평가하고 모범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이 당연시 되는 문명화된 사회, 그런 1급수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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