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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울에 삽니다]

당신은 서울에서의 첫 집을 기억하나요?


 












2011년 12월, 23살. 취업으로 급하게 서울에 집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3평대의 원룸조차 가격이 부담스러웠고, 직장 근처에 거주하는 친척도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던 중 ‘하우스 메이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은 따로 쓰고, 거실 화장실 등은 공용으로 이용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사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의 생활, 불편하지 않을까? 찾아간 집이 30년 넘은 낡은 주택인데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비용을 생각하며 하우스 메이트로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시작한 생활은 의외로 너무 편하고 좋았다. 요일을 나누어 청소하고, 공과금을 정확하게 나누고, 개인 물품은 각자 구매하고... 규칙을 통해 공정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2023년 현재까지 같은 집에서 하우스 메이트를 구해 함께 살고 있다. 하우스 메이트는 3번 바뀌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생활이 잘 맞고, 주인분이 월세를 올리지 않아 계약이 연장된 덕분에 오래 생활할 수 있었다.

곧 결혼 예정이라 이 집을 떠나게 되지만, 이런 기회에 나의 첫 독립 집이자 마지막 집을 소개할 수 있어서 감회가 남다르다. 고마웠어, 나의 집.

박수재, 35세

서울의 한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19살에 서울에 입성했다. 대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자마자 학교 근처에 있는 고시원을 물색했다. 학교 건너편 대로변에 위치한 얼굴만한 창문이 있는 고시원이 나의 서울 첫 집이 되었다.

택배로 부친 상자 두 개가 내 이삿짐이었다. 비록 성인 두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으나 서울 하늘 아래 온전한 나의 공간이 주는 뿌듯함이 있었다. 상자를 뜯어 아기자기한 그 방에 물건을 배치하며 첫 독립에 기대가 부풀었다.

그 방은 심각하게 방음이 안됐다. 왼쪽 방 사람이 통화하며 깔깔대는 소리, 오른쪽 방 사람이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사연은 모르지만, 내가 오른쪽 방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공용주방에 있는 밥솥에 밥을 해두고 밥이 다 되면 주걱으로 밥을 고슬고슬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몇 년에 걸쳐 고시원과 옥탑 반지하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청년 전세임대주택에 거주한다. 첫 집에 비교하면 이젠 옆방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가 먹을 밥만 해두면 되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다. 내가 살던 그 고시원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곳에서 첫 서울의 보금자리를 틀은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과거를 응원하듯이 그들의 과거를 응원하고 싶다.

시소, 33세

약 10년 전,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과 대출을 합쳐도 서울에 전셋집을 구하기는 녹록지 않았다. 당시 맞벌이인 두 식구였지만 아기가 태어날 것을 생각하면 20평 정도의 집을 구하고 싶었다. 발품 팔아 겨우 찾은 상계동의 약 20평 아파트, 비록 전세지만 우리의 첫 집인 만큼 애정이 많이 갔다. 지은 지 30년 넘은 노후된 아파트였지만 벽지도 도배하고, 콘센트도 교체하는 등 예쁘게 꾸미고 알콩달콩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2년 뒤 계약이 끝날 무렵, 주인분이 월세로 전환한다고 말씀하셔서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을 알아봐야 했다. 서울살이 첫 집이기도 하고, 애정을 쏟고 손을 많이 본 집이라 떠날 때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부부의 추억을 많이 담겨있는 만큼,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 집이다.

김희영, 42세

졸업, 그리고 서울로 첫 상경. 나의 서울에서의 첫 집은 동생과 둘이서 살았던 작은 6평짜리 집이다. 그때 동생은 고시생, 나는 취준생이라 둘 다 미래가 막막했다. 더군다나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인원 제한, 거리두기 강화 등 사회가 얼어있던 시기였다. 불안한 미래 속에서 동생과 나는 울기도, 많이 싸우기도 했다. 물론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6평 안에서 많이 웃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그 동네를 가면 나도 모르게 한 번씩 그때의 추억에 잠긴다.

Day, 28세

아마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집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기 힘들어진 것 같다. 다들 각자 방에 들어가서 개인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리 텅 빈 거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정서의 연결이 결핍된 상태를 조금씩 체감할 때쯤,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조금 좁긴 해도 낮에는 거실로 볕이 쏟아지고 복도엔 노을이 번지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12층에 위치한 집으로.

미세먼지 농도에 따라 조명 색상이 달라진다는 남산타워를 보기 위해 온 가족이 거실로 모였다. 그 때 우리가 어떤 발자취를 남기며 서울에 오게 되었는지, 서로 촘촘히 쌓아온 감정의 결합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무언가를 이룬 느낌, 유대감 같은 것을. 그제야 거실이란 공간이 제 역할을 해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을 떠올렸을 때 따듯한 정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현실의 경쟁에 지친 내가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그런 곳, 다시 고단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나를 지지해주는 공간. 나한텐 지금 서울의 집이 그렇다. 우리 가족에게 다시금 온기를 느끼게 해 준 ‘우리 집’.

김연주, 31세

우리 부부의 신혼집은 창덕궁 앞에 있었다. 소중한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매일 남편과 산책을 했다. 저녁에 퇴근하면 인사동과 종로3가, 청계천을 걸어 다녔고, 주말이면 창덕궁, 경복궁, 종묘 등을 다니곤 했다. 예쁜 꽃이 가득했던 봄날,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산책을 나왔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종묘를 거닐고 창경궁을 다니면서 서울이라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매일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 세 명의 엄마 아빠가 되었고, 오랜 해외생활 끝에 우리 부부는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서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아름답고 다채롭다. 을지로, 동대문, 평화시장, 청계천, 남산, 종각, 광화문... 서울 중심에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많은지 매일 봐도 지겹지 않다.

지금도 신혼집을 지나칠 때면 예전 생각이 난다. 예쁜 꽃향기가 가득했던 나의 첫 집. 서울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다.

이혜림, 40세

어릴 때는 일산에서 살다가 아빠의 뜨거운 교육열로 강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빠께서는 당시 사업도 잘되기도 했고, 지인의 자녀가 강남 학군에서 잘 되는 케이스를 보고 욕심을 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어렸던 나는 잘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교육을 위해 힘써준 덕분에 나와 오빠가 지금처럼 잘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빠에 대한 감사함과 사랑이 녹아있다.

Princess YK, 36세

강원도에서 20년을 살고 독립해 서울에서 첫 집을 얻게 되었다. 단칸방에 살림살이도 여행 가방 두 개뿐, 그렇게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나는 이사 온 첫날을 잊지 못한다. 집들이를 와준 친구들이 작은 미니 전기밥솥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방 한가운데에 밥솥을 열어 놓고 내가 잘되길 바란다고 기도를 해줬다. 알고 보니 친구의 어머니가 이렇게 해야 배곪지 않고 배부르게 잘 산다고 알려줘서 준비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던 사회초년생인 친구들이 어떻게 알고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떨어져 지낸 걸 알고 반찬도 종종 보내주고 사회생활로 힘들 때 말벗도 해준 고마운 친구들, 나에게 서울에서의 첫 집은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억된다.

블루발렌타인, 29세

서울에서의 첫 집은 내가 태어난 신림동에 위치한 어느 달동네 멘션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작고 낡은 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왜 이리 넓고 좋아 보였을까?

동네 친구들 열댓 명과 관악산과 계곡을 누비며 가재,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동네에 작은 가로등에 켜진 불빛만으로 다방구, 숨바꼭질, 딱지치기... 정말 많은 놀이를 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이면 동네 친구들과 함께 박스 상자를 가지고 나와 언덕에서 신나게 썰매를 탔다. 그 옆에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연탄재를 뿌리고 꾸짖으셨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썰매를 즐겼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고, 지금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어느 날 문득 추억에 잠겨 놀러 갔는데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놀이터가 들어서고, 새로운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너무 어렸던 시절이라 그 당시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는데, 그 친구들의 모습들이 아직도 너무 아련하다.

kelick, 42세

10년 전 부산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가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당시 친오빠도 서울에 있어서 남매가 함께 지낼 집을 구하는데, 모아둔 돈에 비해 보증금과 월세가 비싸서 우리가 지낼 수 있는 집을 구하러 한참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7평 남짓의 원룸을 구해서 친오빠와 함께 생활했는데, 그 좁은 곳에서 큰 불평불만 없이 잘 지냈다. 가끔 빨래, 화장실 청소로 싸우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또 언제 친오빠와 여동생이 그렇게 붙어서 지내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남매가 함께 한곳에 살아서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린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은 10년 동안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 준비 중 예비 신혼부부로 SH 행복주택에 입주해서 쾌적하고 좋은 환경에서 2년째 살고 있다. 신혼부부가 서울에 새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SH의 행복주택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어서 출발이 그 누구보다도 좋았던 것 같다.

든든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심리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지 지금은 임신 4개월째!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다.

처음 친오빠와 살았던 원룸부터 지금의 집에 살기까지 서울에서의 집들은 모두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앞으로도 행복한 일들이 생겨나길 기대한다.

아로하,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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