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걷다]
서울의 숨겨진 명소! '칠궁과 백사실 계곡'
가을이 스러져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왠지 사라진 것을 기억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초록이 잠들어가며 내뱉는 갈 빛 추억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 계절이다. 이럴 때 가 볼 수 있는 텅 빈 것 같으나 묘한 채움을 얻을 만한 곳이 있어 소개한다. 서울에 있는데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소란스럽지 않고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칠궁과 백사실 계곡이다.
칠궁
칠궁이 조성되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 혹은 왕으로 추존된 아들을 낳은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며,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답게 사람을 대접함에 있어 신분, 서열, 사회적 규범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니 아무리 왕을 낳았어도 그 신분이 후궁이었다면 종묘에 모실 수가 없었다.
그런 조선의 왕 중,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것 같다. 무수리에서 자신을 낳아 숙빈이 되었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영조는 숙빈묘를 만들어 제사를 자주 지냈다. 그러다가 육상묘라 이름을 변경하였고 마침내 육상궁으로 개칭한다. 1908년 육상궁과 더불어 흩어져 있던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한 데 모였고, 1929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의빈태자의 모친, 순현왕귀빈 엄씨의 덕안궁까지 더해져 지금의 칠궁이 조성되었다.
장희빈과 사도세자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곳
너무도 유명한 장희빈이 바로 대빈궁에 모셔져 있다. 희빈 장 씨는 경종의 생모이다. 장 씨는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에서 숙의에 올랐을 때 경종을 낳아 희빈이 되었고,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왕비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인현왕후 민 씨가 복권되자 희빈으로 내려앉았으며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결국 사약을 받는다. 희빈 장 씨 이후, 조선은 후궁은 아무리 왕을 낳아도 왕후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사도세자, 그의 모친인 소유영빈 이 씨를 모신 곳이 있다. 바로 선희궁이다. 정조가 왕이 된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선위궁의 신위도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를 지극히 여겼던 할아버지 영조 못지않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했던 정조의 효심이 돋보인다.
칠궁은 경복궁 뒤쪽, 청와대 내에 있어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가 2001년에 청와대 관광코스로 일반에게 개방이 된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하면 해설자의 설명과 함께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3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15분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도 비슷하게 걸리니 특별히 걷는 게 불편하지 않다면 길목인 효자동을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백사실 계곡
칠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울의 숨겨진 보물인 백사실 계곡이 있다. 백사실이란 지명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부원군 이항복 대감의 호, 백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의 별서가 있었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혹자는 부암동 비밀의 숲이라고도 말한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을까 할 만큼 첩첩산중이며,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고적한 곳이다. 특히 늦가을 마지막 단풍을 즐기며 산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흐르는 계곡물은 서울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1급수로 도롱뇽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계곡 위에는 현통사라는 절이 있고 거기서부터 능금마을 상류까지 약 1Km는 자연환경보호구역으로 보호되고 있다.
백사실 계곡을 찾아가려면 3호선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타고 부암동 윤동주문학관에 하차하여 올라가면 된다. 부근에 청운문학도서관이란 한옥 도서관이 있어 잠시 머물러 가도 좋다. 도서관을 지나면 서울 4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이 나오고 근처에 드라마 <커피 프린스> 촬영지인 유명한 부암동 카페 '산모퉁이‘가 있다. 거기를 지나면 곧 백사실 계곡이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의 뒤숭숭한 현실 속에서, 녹녹치 않은 왕궁의 삶을 살다 간 후궁들의 애환을 기리며, 깊은 산중에서 늦가을의 정취와 속세의 시름을 잠시 잊기 위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칠궁과 백사실 계곡을 찾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