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신촌의 넓은 집에서 신월동 12평 반지하 주택으로 서둘러 이사를 했다. 여섯 식구가 방 2칸에서 살게 되자 힘든 일이 많아졌고, 가족 모두 날카롭고 어두워졌다.
얼마 후, 옆집으로 이사 온 이웃은 우리 집보다 더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화재로 인해 목숨만 건지고, 이 집으로 이사 왔다는 것이다. 이웃집에는 나와 또래인 쌍둥이도 있어 더 마음이 쓰였다. 동네 작은 교회에서 우리 집과 이웃집이 예전처럼 살 수 있기를 기도했다.
몇 년 뒤 이웃집은 친척이 사는 지역으로, 우리 집은 반지하에서 벗어나 가양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지금도 종종 이웃이었던 쌍둥이 가족이 생각난다.
김쌤
종로5가에서 귀금속 세공을 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와 자취한 적 있다. 함께 살게 되니 처음엔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목욕탕에 같이 다녀온 뒤로 더욱 친해지고 잘 지낼 수 있었다. 3개월 정도 후 따로 살게 되었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며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후 친한 선배와 작은 은제품 공방을 차리면서 함께 살기도 했다. 선배는 결혼을 해서 형수님도 계셨는데, 감사하게도 친동생처럼 잘해주셨다. 집안일도 많이 도와드리고, 같이 외식도 하고, 주말에 여행을 다니기도 하며 6개월 정도 지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게 부담도 되고 뭔가 이상하지 않을까 망설임도 있었지만, 살고 보니 좋은 사람과 함께 지낸 게 추억이고 행복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섯잎클로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만 살다가, 취업을 계기로 서울에 살게 되었다. 나의 서울 첫 보금자리는 홍대입구쪽 지하 단칸방이었다. 창문을 열면 카페와 술집이 있는 거리여서 늘 창문은 닫고 살았다.
이후 나와 비슷한 직장 동료를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친구의 고향은 청주였는데,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보니 지하방이여도 늘 밝게 빛나는 행복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비록 지하에서 시작했지만, 그렇게 나의 서울 생활은 행복을 키워나갔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그 때 그 시간이 나에겐 참 소중했고, 추억이 많아 지금도 가끔씩 지하 단칸방을 찾아가곤 한다.
설레이는맘
안양 여자와 대전 남자가 만나 서울에 집을 구하고, 신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즐기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를 알 수 있는 광화문, 덕수궁,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 등을 자주 찾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 곳곳을 다니기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어 버스나 지하철로 다니기 좋았다. 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지니
서울에서 첫 취업을 하게 되었다. 입사 초 출퇴근을 하며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게 직장 근처 게스트하우스에서 살기였다.
당시 회사와 가까운 명동은 외국인이 많은 관광지이다 보니,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게스트하우스가 많았다. 명동 게스트하우스에서 외국인들과 인사를 하고, 조식을 먹고... 마치 해외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으로 생활했다. 공용생활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통근시간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좋았다. 이곳에서 1달 정도 살다가, 집을 구해 이사했지만 아직도 좋은 추억이다.
채빈
첫 자취는 15년 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부모님 도움은 최대한 받고 싶지 않아 룸메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동갑인 사촌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당시 직장은 을지로입구역 근처. 통근하기 용이한 2호선 라인을 찾아보았는데, 아무래도 집값이 부담스러웠다. 열심히 발품을 팔아 비교적 저렴한 월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은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지하철역 근처라 통근이 편리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구하고, 내 힘으로 월세를 내는 자취인의 삶이 뿌듯했다.
연고 없는 대도시, 사회 초년생인 나 혼자서 서울에 살았다면 우울했을 것 같지만 옆에 사촌이 있어 잘 견딜 수 있었다.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살면 집안일을 분담해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어 좋다.
커피한잔의여유
어린 시절, 부모님 직업상 자주 이사를 다녔다. 그 중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은, 할머니가 사시던 면목동의 집이다.
할머니 손을 붙잡고 광장시장에 가곤 했다. 할머니는 한약재를 사고, 내가 좋아하는 보리차를 끓이기 위한 재료도 꼭 구매하셨다. 간식으로 술빵을 주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보살핌과 사랑 덕분에 나에게 서울은 그립고 따뜻한 곳이 되었다.
cosmeter
월세로 시작한 서울살이, 버는 것 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지면서 따로 살던 동생과 집을 합쳐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동생과 나는 성격도 취향도 정반대라 부모님이 괜찮겠냐며 걱정하실 정도였다. 하지만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그 모든 걸 해결해줬다.
전세사기 문제를 대비하고, 대출이자를 고려하며 부동산과 전세집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덕분에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동생과 전장의 전우애 혹은 동지애 같은 것도 생겨났다. 힘든 시간을 함께 지나며 더 돈독해진 동생과 나, 오늘도 서울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fhthtjs
강서구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아왔다. 대학 입학 후 자취에 대한 로망이 생겼지만, 통학시간이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본가에서 쭉 다녔다.
아르바이트로 여윳돈이 생기고, 가족과 생활양식의 차이로 혼자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커졌을 때 쉐어하우스를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부담감, 주방이나 화장실 등 공유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학교 근처에서 적은 비용으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커 쉐어하우스 입주를 신청했다.
그렇게 연립주택 2층에서 여자 3명이 함께 살게 되었다. 집에서 식기류, 이불 등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방에 어울리는 스탠드를 사며 분위기를 더했다. 3달 정도 살다가 타 지역에서 인턴을 하게 되며 떠났지만, 쉐어하우스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밤늦게 들어가도 괜찮은 나만의 공간에서 오는 자유로움! 공유하는 공간은 불편함도 있었지만, 덕분에 자유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Lemonee
대학 졸업 후 취업을 계기로 이사하던 중, 부동산 사기를 당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어 막막하던 차에 친한 동생이 "보증금은 이미 냈으니, 월세를 반씩 내고 원룸에서 함께 살자"고 말해주었다.
화장실 하나 딸린 곳이다 보니 불편했을 텐데 같이 지내준 동생에게 너무 고마웠다. 동생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3개월 정도 함께 살다가 자취방을 구해 나오게 되었지만 함께 밥 먹고, 자고, 놀러가고, 고민 상담하던 그때가 '함께' 살아간 경험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