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재해석으로서의 바스키아
장 미셸 바스키아는 20세기 후반 뉴욕 미술계의 중심이자, 인종과 언어, 기호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업은 낙서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언어, 해부학, 음악, 자본, 인종 등 다양한 주제를 시각 기호로 번역하며 그 안에서 서구 중심 미술의 서사를 비틀고 새로운 예술 언어를 제시한다. 회화와 드로잉 약 70점, 그리고 작가의 아티스트 북 8권을 통해 그의 시각 언어를 체계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던 이번 전시를 전시 구간 별 이미지와 함께 둘러보자.
 | Phooey & Fun Gallery
1982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첫 공간에서는 바스키아가 캔버스의 형식 자체를 해체하며 물질적 실험을 시도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그는 천을 나무판자나 팔레트에 직접 붙이고 못이나 새끼줄로 고정해 회화의 표면을 하나의 구조물로 변형했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화폭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이자 그가 예술을 하나의 ‘조립된 제단’처럼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대표작인 Phooey에는 ‘JAPANESE LOUDSPEAKER’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동시대 일본의 경제·기술력과 그 자신이 속한 문화적 혼성의 현실을 반영한 상징적 언어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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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rriors & Power Figures
두 번째 섹션은 바스키아의 전사 형상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인물들은 전통적인 영웅상이 아니라 힘과 취약함, 저항과 존엄이 공존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왕관, 무기, 후광 같은 요소는 권력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인종차별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내적 투쟁을 나타낸다. 이러한 형상은 한국의 무신도나 전통 전사도와도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서로 다른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전사’라는 상징은 인간이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보편적 표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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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s and Masks
바스키아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해골과 가면은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영적 보호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 전통 가면의 형상과 부두교의 상징을 현대 도시의 맥락 속으로 끌어와 재해석했다. 그의 인물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억압의 역사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품는다. 한국의 가면극이 웃음 속에서 사회 구조를 비틀듯, 바스키아의 가면은 불평등한 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한다. |
 |  | Temple of Words
그가 남긴 노트 속 단어와 드로잉, 철자 오류, 반복되는 문장은 그의 사유 과정이 언어로 축적된 기록이었다. 바스키아의 노트는 언어의 형상과 에너지를 탐구했고 그의 기록은 문자의 의미를 넘어 언어가 예술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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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idden Signs
‘숨겨진 기호’ 섹션에서는그의 작품 속 상징들이 지닌 다층적 의미가 소개되었다. 왕관, 달러 기호, 저작권 표시, 공증 도장 같은 기호들은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Emblem은 블랙라이트를 비추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해골 형상과 기호들이 드러나며, 작품 전체가 하나의 암호 구조로 변한다. 이 과정은 질서와 혼돈, 명료함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바스키아 예술의 핵심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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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eum Security — 파편과 질서의 공존
전시의 마지막 섹션은 1983년의 Museum Security 시리즈였다. 이 작품은 단어, 기호, 이미지가 뒤섞이면서도 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구성을 보인다. 그는 역사, 만화, 상표, 정치적 언어를 차용해 복잡한 정보의 망을 구축했다. 이는 파편을 조합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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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바스키아의 예술은 전통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기호와 언어를 통해 전통의 원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의 왕관, 해골, 가면, 단어들은 현대 사회 속에서 다시 태어난 신화의 조각들이다. 그는 전통을 과거의 유산으로 남기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전통’이란 단어가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시간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지속의 리듬’임을 실감하게 된다.